사람과 시인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 / 고운기

파주노을 2019. 9. 30. 23:03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

- 고운기

 

 

1

먼 바다 쪽에서 기러기가 날아오고

 

열몇 마리씩 떼를 지어 산마을로 들어가는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

 

사립문 밖에 나와 산과 구름이 겹한

 

새 날아가는 쪽 하늘 바라보다

 

밀물 드는 모랫벌 우리가 열심히 쌓아두었던

 

담과 집과 알 수 없는 나라 모양의

 

탑쪼가리 같은 것들을 바라보면

 

낮의 햇볕 아래 대역사를 벌이던 조무래기들

 

다 즈이 집들 찾아들어가 매운 솔가지 불을 피우고

 

밥 짓고 국 나르고 밤이 오면 잠들어야 하는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

 

분주히 하루를 정리하고들 있었다

 

그러면 물은 먼 바다에서 출발하여

 

이 마을의 집 앞까지 밀려와 모래담과

 

집과 알 수 없는 나라 모양의

 

탑쪼가리 같은 것부터 잠재웠다

 

열심히 쌓던 모든 것을 놓아두고

 

각자의 집으로 찾아들어간 조무래기들의 무심함만큼이나

 

물은 사납거나 거세지 않게

 

천천히 고스란히 잠재우고 있었다

 

먼 바다 쪽에서 기러기가 날아와

 

산마을 어디로 사라지는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

 

 

2

이 도시에서 밀물처럼 몰려오는 어둠

 

먼 시가지가 보이는 언덕길 버스 종점에 내려

 

돌아올 버스 토큰 하나 남았던 허전함처럼

 

모두 쓰고 버리고 힘들어 쌓아놓고 오는 밤

 

불을 키우고 어둠을 밝혀

 

한낮의 분주함도 이으려지만

 

먼 옛마을에 찾아와 호롱불 몇 개로 정체를 밝히던 어둠이여

 

오늘 인공의 빛을 피해 찾아오는 밀물이여

 

이미 어린아이 적처럼

 

만들었던 것들과 무심히 결별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깊은 잠을 주고 또 평평히

 

세상의 물상들 내려앉히는

 

대지의 호흡이여

 

 

어느 땐가 밤이 깊어져

 

물은 떠나온 제 땅으로 돌아가고

 

백지처럼 정돈된 모랫벌에 아침이 오면

 

이루었으나 아무것 이룬 것 없는 흔적 위에

 

조무래기들 다시 모여들었더니

 

물이 들어왔다 나간 이 도시의 고요함을 딛고

 

내가 간다

 

살아왔던 일일랑 잊을 만하고

 

새 벌판은 끝이 없어

 

또 쌓아야 모습은 못날 뿐이지만

 

일이 끝나 날이 저물면

 

가슴에 벅차도록 몰려오는 밀물은

 

산이 되고 밭이 되고

 

집과 자동차와 친구가 되고

 

정승이 되고 나라가 되고

 

희망도

 

사랑도 되었을 것을

'사람과 시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늙어가는 아내에게 / 황지우  (0) 2019.10.01
김경미 시 두 편, 사랑의 근거 / 겹  (0) 2019.10.01
편지 - 구둔역에서 '노을'   (0) 2019.09.30
빈집 / 김사인  (0) 2019.09.30
고요한 길 / 김사인  (0) 2019.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