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시인

고요한 길 / 김사인

파주노을 2019. 9. 30. 10:40

 

고요한 길

- 김사인

 

 

 

    지나는 사람 없고

    시든 엉겅퀴 대궁만 멀춤할 때 늙은 호박 엉덩이 무거워져 이제 혼자는 못 일어설 때

    늦은 봉숭아 꽃잎 몇낱과 쇤 고구마줄기와 아주까리, 한사코 감고 오르는 까끄랭이 환삼과 개미들과

    먼 데 누워 계시는 윗대 어른들 생각과 다시 콩밭과

    잘 벌은 깻잎과 고추밭과 열무 배추와 불쑥한 토란대 몇 뿌리와 순간 까투리 푸다닥 날고, 문득 아픈 아내 생각과

    밭둑 수숫대와 영글어가는 나락들과 엉뚱한 흑장미 한그루와

    처서 백로 지나 오오 바람도 흙도 풀도 볕에 잘 마른 것,

    개미들은 잠시도 가만있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들로 나는 두루 그득해져

    자불자불 졸리면서

    전주 이씨네 산소 치장이나 한번 볼까 길을 바꿔 잡으며

    어머니 비석에는 남원 양 아무개 여사라고 써볼 생각과 그럼 학생부군 아버지는 뭐라고 하나 싱거운 생각도 들다가

    이 별의 한 모퉁이에 나도 머무는 데까지 잘 머물다가 어른들 가시는 것 봐드리고, 장인 장모님도 잘 배웅해드리고, 친구들과도 오명가명 지내다가, 세금이나 과태료 같은 거 밀린 것 없이 있다가, 아이들 짝 만나 서로 돌봐가며 지내는 것 잠깐 보다가, 좀 아파보니 아파서 죽는 건 아무래도 힘들 것 같다는 아내 말마따나 너무 많이 앓지는 말고, 그만할 때쯤 내릴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

 

    여뀌풀꽃 분홍 수줍고

    배추잎 하나가 우산만 하고

    다만

    고요한 길

 

- 김사인, <어린 당나귀 곁에서/창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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