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길
- 김사인
지나는 사람 없고
시든 엉겅퀴 대궁만 멀춤할 때 늙은 호박 엉덩이 무거워져 이제 혼자는 못 일어설 때
늦은 봉숭아 꽃잎 몇낱과 쇤 고구마줄기와 아주까리, 한사코 감고 오르는 까끄랭이 환삼과 개미들과
먼 데 누워 계시는 윗대 어른들 생각과 다시 콩밭과
잘 벌은 깻잎과 고추밭과 열무 배추와 불쑥한 토란대 몇 뿌리와 순간 까투리 푸다닥 날고, 문득 아픈 아내 생각과
밭둑 수숫대와 영글어가는 나락들과 엉뚱한 흑장미 한그루와
처서 백로 지나 오오 바람도 흙도 풀도 볕에 잘 마른 것,
개미들은 잠시도 가만있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들로 나는 두루 그득해져
자불자불 졸리면서
전주 이씨네 산소 치장이나 한번 볼까 길을 바꿔 잡으며
어머니 비석에는 남원 양 아무개 여사라고 써볼 생각과 그럼 학생부군 아버지는 뭐라고 하나 싱거운 생각도 들다가
이 별의 한 모퉁이에 나도 머무는 데까지 잘 머물다가 어른들 가시는 것 봐드리고, 장인 장모님도 잘 배웅해드리고, 친구들과도 오명가명 지내다가, 세금이나 과태료 같은 거 밀린 것 없이 있다가, 아이들 짝 만나 서로 돌봐가며 지내는 것 잠깐 보다가, 좀 아파보니 아파서 죽는 건 아무래도 힘들 것 같다는 아내 말마따나 너무 많이 앓지는 말고, 그만할 때쯤 내릴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
여뀌풀꽃 분홍 수줍고
배추잎 하나가 우산만 하고
다만
고요한 길
- 김사인, <어린 당나귀 곁에서/창비> -
'사람과 시인'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편지 - 구둔역에서 '노을' (0) | 2019.09.30 |
|---|---|
| 빈집 / 김사인 (0) | 2019.09.30 |
| 가을산 / 김명인 (0) | 2019.09.30 |
| 가을의 끝 / 김명 (0) | 2019.09.30 |
| 겨우내 / 노을 (0) | 2019.09.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