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시인

김경미 시 두 편, 사랑의 근거 / 겹

파주노을 2019. 10. 1. 08:47

 

사랑의 근거 - 김경미

 

 

 

그해 여름.

 

꽃무늬 비닐장판 같은 게 인생에 마구 쏟아져들어왔다

 

밤 열두시 십분의 택시기사는 차를 마시자며

 

이대로 헤어지면 다시 만날 확율이 7만 5천 분의1,이라고

 

어디 근거인지 모르겠으나,

 

 

75만 분의 1인 사랑도 메일 그냥

 

스쳐간답니다

 

( 정유점 빛깔의 6월 장미들 면장갑 긴 손으로 매일

 

가슴 부위를 손질하고 나도 더러 누군가를 손질하지만

 

통증의 근거 또한 아직 알 수 없답니다 )

 

 

태양과 나와 장미와 택시와 면장갑 들이

 

매일 서로 다른 확률의 근거를 호소하던 날들

 

당팽이무늬의 낙엽들 몇번쯤 지나면 비닐꽃무늬도

 

찾아들겠으나

 

택시가 또다른 여자에게 건너갈 확률은 99퍼센트

 

어떤 여자가 그에 응할 확률은

 

 

모르겠으되.

 

 

7천 5백만 분의 1로 마주쳐도

 

스치고 마는 눈빛도 있답니다

 

( 우리가 만나 건 어쩌면 0퍼센트의 확률덕분! )

 

어디에도 무엇에도 아직 아무 근거도

 

모른다 합니다 늘 지독한 비닐꽃무늬의 여름들이라 합니다

 

 

 

 

 

겹 - 김경미

 

 

 

1

 

저녁 무렵 때론 전생의 사랑이 묽게 떠오르고

 

지금의 내게 수련꽃 주소를 옮겨놓은 누군가가 자꾸

 

울먹이고

 

 

내가 들어갈 때 나가는 당신 뒷모습이 보이고

 

여름 내내 소식 없던 당신, 창 없는 내 방에서 날마다

 

기다렸다 하고

 

 

2

 

위 페이지만 오려내려 했는데 아래 페이지까지 함께 베이고

 

 

나뭇잎과 뱀그물, 뱀그물과 거미줄, 거미줄과 눈동자, 혹은 구름과 모래들, 서로 무늬를 빚지거나 기대듯

 

지독한 배신밖에는 때로 사랑 지킬 방법이 없고

 

 

3

 

그러므로 당신을 버린 나와

 

나를 버린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청순하고 가련하고

 

 

늘 죽어 있는 세상을 흔드는 인기척에 놀라 저만치

 

달아나는 백일홍의 저녁과

 

아주 많이 다시 태어나도 죽은 척 내게로 와 겹치는

 

당신의 무릎이 또한 그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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