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시인

늙어가는 아내에게 / 황지우

파주노을 2019. 10. 1. 18:23

 

늙어가는 아내에게    

- 황지우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어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굽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 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주었지

 

그런 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몇 날 밤을 잠 못 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그대의 그 말은 에탐부톨과 스트렙토마이신을 한알 한알

 

들어내고 적갈색의 빈 병을 환하게 했었지

 

아, 그곳은 비어 있는 만큼 그대 마음이었지

 

너무나 벅차 그 말을 사용할 수조차 없게 하는 그 사랑은

 

아픔을 낫게 하기보다는, 정신없이,

 

아픔을 함께 앓고 싶어하는 것임을

 

한 밤, 약병을 쥐고 울어버린 나는 알았지

 

그래서,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

 

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끝에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 묻힌 손으로 집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