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시인

겨우내 / 노을

파주노을 2019. 9. 29. 19:49

 


겨우내

    - 노을

 

 

   귤을 깐다 먹고 싶다거나 맛있다거나, 감상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밖에는 달리 할 일이 없는사람처럼 귤을 깐다 내가 귤을 깔 때 첫눈이 내리고 까놓은 것을 어쩌지 못해 볼이 미어지도록 꾸역꾸역 밀어 넣을 때 눈보라가 몰아쳤다

 

 

   내가 귤을 까는 동안 플라스틱 통에서 시들던 파가 푸르게 자라나고 가지를 쳐낸 벤자민 화분에서 겨울눈이 돋았다 너는 떠났다 나는 주먹만 한 귤을 들고 보푸라기 같은 속살을 묵묵히 떼어낸다 의식을 치르듯 떼어낸다 눈에서 입꼬리에서 달큰하게 흐르는 반달빛 밀어들 맨발을 절뚝이며 얼마만큼 갔을까 너는 대체 얼마만큼이나 갔을까,

 

 

   귤을 좋아하는구나 오해하며 너는 눈발 사이를 걸어 깊은 겨울로 들어가고 나는 고개를 숙이고 앉아 말없이 귤을 깐다 보푸라기 같은 기억들을 하나씩 떼어낸다 방 안 가득 차오르는 새콤한 귤 향기 무장무장 무너져내리는 달콤한 귤 향기

 

 

   시린 손을 뻗어 솜이불을 당기지만 위풍처럼 파고드는 절름발이의 촉수들 잠든 세포를 깨우던 내 몸의 지문들 웅크린 채 웅크린 채 또 다시 귤을 깐다 발톱이 노랗도록 밤새워 귤을 깐다 그리하여 겨울이 가고 보푸라기 같은 흰 눈발 내 집을 덮으리라 내 속에서 무럭무럭 귤나무가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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