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시인

서정주 / 자화상

파주노을 2009. 8. 17. 10:16

자화상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으련다.

찬란히 틔여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사람과 시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인수 / 시 세 편  (0) 2009.08.26
원희석 / 그리움의 싹  (0) 2009.08.19
고두현 /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0) 2009.08.17
박목월 / 하관  (0) 2009.08.11
김정임 / 소라의 집  (0) 2009.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