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여자
원희석
가을 여자, 이 은사시나무 이파리처럼 흔들리는 말 속에는 아침이
산다 맑고 정갈한 순결의 힘 빛의 힘 초록의 힘 뼛속에서 솟아나는
절정의 힘으로 부드러운 풀잎이 되기도 하고 날카로운 칼날이 되기도
한다
가을 여자, 이 서릿발이 숭숭숭 돋은 말의 한가운데에는 차가운 이
별이 있다 카키색 코트 깃에 체크 무늬 머플러를 두르고 작은 마을로
떠나는 쓰다 만 편지 한 장이 떨어져 있다 덜컹이는 기차를 타고 가다
문득 내려선 어느 이름없는 간이역, 그 길 옆의 플나타너스 나무들이
옷을 활활 벗어던지는 낡은 그림 한 장이 숨겨져 있다
낙엽과 함께 뒹구는 계절의 온도와 지금껏 감춰두었던 삶의 온도를
오색 풍선처럼 날려보내고 난 뒤의 하얀 여백이 있는 노트, 그 노트
의 한쪽 귀퉁이는 찢어져 있지만 그 찢어진 부분이 눈물로 접혀 있기
에 그 이별은 아름답다 목적이 있는 기다림이 아닌 맹목적 기다림 이
별을 포함한 기다림 만남을 포기한 기다림 그래서 그 기다림의 한쪽
은 약간 깨져 있다 한쪽 귀퉁이가 조금 깨져 있지만 그 깨어짐으로 인
해 그 기다림은 넉넉하다 그의 왼쪽 구두 뒤축은 약간 닳아 있고 그
닳아진 높이만큼의 깊은 침잠, 그곳에 도착하기 까지의 고통, 그래서
그 기다림의 상처는 분홍빛 능금이고 그 능금의 반을 쪼개면 까만 기
다림으로 뭉쳐진 씨 하나가 들어있다
가을 여자, 이 신발 뒤축이 한쪽으로만 닳은 말속에는 새가 산다 마주
서면 손 흔들 용기는 있어도 돌아서면 혼자인 한마리 티티새, 그 돌아
섬과 마주섬의 순간에 커다란 별이 뜨고 그 별에 사는 티티새는 혼자이
기에 이 땅의 가을은 쓸쓸함이 가득하다
가을 여자, 이 작은 주머니가 달린 말 속에는 나무가 자란다 드러냄보
다는 감춰짐을 사랑하는 나무, 그 뿌리는 언제나 텅 비어 있음에 가득
차있고 쌓아놓지 않기에 무너지지 않는다 이 나무는 안으로 안으로 상
처를 먹고 자라고 고독이란 비료를 먹고 자란다 그래서 그 나무의 가지
끝에는 미소가 열린다 은회색 빛깔을 가진 투명한 나무 그 나무의 열매
는 작지만 향기가 짙어 이 땅의 어디서든 맨발로 갈 수 있다 날개 없이
도 하늘을 날고 형체 없이도 영원히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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