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시인

가을 여자 / 원희석

파주노을 2009. 7. 31. 22:32

가을 여자

                         원희석

 

   가을 여자, 이 은사시나무 이파리처럼 흔들리는  말  속에는 아침이

 

 산다  맑고  정갈한 순결의 힘 빛의 힘 초록의 힘 뼛속에서  솟아나는

 

절정의 힘으로 부드러운 풀잎이 되기도 하고 날카로운  칼날이 되기도

 

한다

 

   가을 여자,  이 서릿발이 숭숭숭 돋은 말의 한가운데에는 차가운 이

 

별이 있다 카키색 코트 깃에 체크 무늬 머플러를 두르고 작은  마을로

 

떠나는 쓰다 만 편지 한 장이 떨어져 있다 덜컹이는 기차를 타고 가다

 

문득 내려선 어느 이름없는 간이역, 그 길 옆의 플나타너스  나무들이

 

옷을 활활 벗어던지는 낡은 그림 한 장이 숨겨져 있다

 

  낙엽과 함께 뒹구는 계절의 온도와 지금껏 감춰두었던  삶의 온도를

 

오색 풍선처럼 날려보내고 난 뒤의  하얀 여백이 있는 노트, 그   노트

 

의 한쪽 귀퉁이는 찢어져 있지만  그 찢어진 부분이 눈물로 접혀 있기

 

에 그 이별은 아름답다 목적이 있는  기다림이 아닌 맹목적 기다림 이

 

별을  포함한 기다림 만남을 포기한 기다림 그래서 그  기다림의 한쪽

 

은 약간 깨져 있다 한쪽 귀퉁이가 조금 깨져 있지만 그 깨어짐으로 인

 

해 그 기다림은  넉넉하다 그의 왼쪽  구두 뒤축은 약간  닳아 있고 그

 

닳아진 높이만큼의 깊은 침잠,  그곳에 도착하기 까지의 고통, 그래서

 

그 기다림의  상처는 분홍빛 능금이고 그 능금의 반을 쪼개면 까만 기

 

다림으로 뭉쳐진 씨 하나가 들어있다

 

  가을 여자, 이 신발 뒤축이 한쪽으로만 닳은 말속에는 새가 산다 마주

 

서면 손 흔들 용기는 있어도  돌아서면 혼자인  한마리 티티새, 그 돌아

 

섬과 마주섬의 순간에 커다란 별이 뜨고 그 별에 사는 티티새는 혼자이

 

기에 이 땅의 가을은 쓸쓸함이 가득하다

 

  가을 여자, 이 작은 주머니가 달린 말 속에는 나무가 자란다 드러냄보

 

다는 감춰짐을 사랑하는 나무, 그 뿌리는 언제나 텅  비어 있음에  가득

 

차있고 쌓아놓지 않기에 무너지지 않는다 이 나무는 안으로  안으로 상

 

처를 먹고 자라고 고독이란 비료를 먹고 자란다 그래서 그 나무의 가지

 

끝에는 미소가 열린다 은회색 빛깔을 가진 투명한 나무 그 나무의 열매

 

는 작지만 향기가 짙어 이 땅의 어디서든 맨발로 갈 수 있다  날개 없이

 

도 하늘을 날고 형체 없이도 영원히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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